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이번엔 책 <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한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에펠탑과 기구가 떠있는 그림의 책표지입니다.
프랑스인들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왜 음식에 쏟아 붓는지
음식을 먹는데에만 그치지 않고 음미하고 이야기하고
음식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지 책을 통해 이해해 보려 합니다.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 설탕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요.
17세기 후반이후 프랑스에서 매우 번창한 낭트에
알록달록한 사탕 배르랭고 낭테와 럼주에 적신 바닐라 케이크 가토 낭테처럼
도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식품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탕수수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지만
무역과 정복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서쪽으로 옮겨져 자라게 되었습니다.
고대 아시리아인과 페르시아인이 중동지역의 설탕산업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고
그뒤 중세 아랍인들이 패권을 쟁취하면서 설탕산업이 더욱도 확대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 중동은 엄청난 수의 설탕 농장과 정제소를 유치하였고
베네치아 같은 신흥 강대국이 설탕 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하게 되었습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발흥으로 중동에서 들여오는 유럽의 설탕공급로가 막히고 말았습니다.
시칠리아와 스페인 같은 유럽의 가장 더운 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려고 하였으나
유럽 시장의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건설로 사탕수수를 경작할 방대한 땅이 생기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카나리아 제도, 브라질, 서인도 제도에
사탕수수 농장과 정제소를 세웠습니다.
설탕이 유럽 시장에 넘처나면서 1600년대 초반 무렵
일반인도 설탕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초콜릿, 커피, 차 같은 새로운 식민지에
음료에 설탕을 가미하게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카리브해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한 설탕 무역의
후발 주자였습니다
프랑스인을 데려와 작업을 시키기엔 비용이 많이 들었고
유럽에서 유입된 새로운 질병으로 죽거나 쇠약해지는 원주민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였습니다.
비인간적인 환경으로 많은 수의 노예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설탕과 커피를 수입하면서 럼주도 실어 나르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에 프랑스 설탕 농장의 고소득 부수입원이 되었습니다.
낭트는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노예 무역항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낭트가 달콤한 과자류가 유명해졌고 산업용 식품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더라도
낭테 같은 설탕 무역의 산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맛있는 케이크 뿐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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